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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올레 공지사항

[올레사람들] 길에서 만난 모든 순간을 기록하며 9번째 완주하는 김재선 씨

425km 26개 코스로 구성된 제주올레 길의 완주는 누군가에겐 버킷리스트이고 누군가에겐 도전의 과제이기도 하다. 3개의 섬 코스 때문에 쉬지 않고 걷는다 해도 꼬박 한 달 이상이 걸리는 제주올레 길의 아홉 번째 완주를 눈앞에 두고 있는 김재선 씨(53.커피유통업. 경기도 수원 거주)를 만났다.

 

완주자 김재선 씨

 

Q. 아홉 번의 제주올레 길 완주라니, 이 정도면 매니아라고 불러야겠습니다

“맨 처음 완주는 2014년이었습니다. 첫 번째 완주를 마쳤을 때,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들이 한꺼번에 찾아왔고 감동했어요. 그 여운이 지금까지 남아 남편과 걷기도 하고 올레꾼들과 함께 걷기도 하지만, 전 혼자 걷는 것을 좋아합니다. 길을 걸으며 만나는 계절마다의 풍경들을 꼼꼼히 기록하기를 좋아하거든요. 집이 수원인데 시간 여유가 생길 때마다 제주에 내려와 올레길을 걷고 있어요. 사실 하도 자주 내려와서 길을 걸어야 하니 아예 시골집을 연세를 내고 얻었어요, 9코스 시작 동네 대평리에 하하.”

Q. 제주올레 길에 빠져든 과정이 궁금합니다

“2014년에 개인적으로 큰 어려움이 많았어요. 남편 사업도 뜻대로 잘되지 않았고, 부부간의 갈등도 있었는데 그 시기에 아버지까지 돌아가 셨어요. 모든 일을 한꺼번에 겪으니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힘이 들더군요. 그래서 무작정 올레길을 걸어야겠다고 혼자 배낭 하나 메고 가출을 했죠(웃음). 1코스부터 걷기 시작했어요. 사실 전 그전에 단 한 번도 트레킹을 해본 적이 없었어요. 걷다 보니 발바닥 전체에 물집이 생기고 곪으면서 통증이 점점 심해졌어요. 발이 너무 아프니까 걸을 때 다른 생각이 전혀 나지 않았어요. 내 육체적 고통에 전전긍긍하고 거기에 모든 신경이 꽂혔습니다. 그러다 보니 나를 괴롭히던 힘든 생각들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더라고요. 저의 가출 원인을 생각하지 못하고 몸에만 집중하게 된 겁니다. 오히려 저에겐 너무 감사한 일이었어요.”

 

 

Q. 첫 번째 가출 후 집에 돌아가서 별일 없으셨나요?

“다 걸을 마지막 즈음에는 빨리 집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발바닥은 여전히 아팠지만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놀랍게도 제가 바뀌어 있었어요. 제가 하는 사업에 더욱 집중할 수 있었고, 그러다 보니 남편 사업도 다시 궤도에 오르기 시작하면서 가정에도 자연스럽게 평온이 찾아왔어요. 이런 과정을 고스란히 지켜본 남편이 먼저 도대체 올레길이 어떤 곳이냐며 궁금해했어요. 그래서 남편을 데리고 제주로 걸으러 왔죠. 수원과 제주를 오르락내리락하면서 남편과 함께 두 번째 완주를 마쳤습니다. 남편에게는 첫 번째였지만. 우리는 부부에서 어느새 올레길 위의 든든한 단짝이더라고요, 하하.”

 

Q. 남편이자 길 위의 동반자라니, 이상적이고 로맨틱합니다

“누구나 한 번쯤은 경험해 보셨을 것 같은데 처음에는 좋았어요. (웃음) 먹고 사는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못다 한 대화를 많이 나눴어요. 살면서 아쉬웠던 일, 우리의 노후준비, 금전적인 상황 등 깊은 이야기들이 오고 가죠. 하지만 부부가 함께 걷다 보니 싸움은 빠질 수 없더라고요. 저는 올레길을 걷고 숙소에 도착하면 그날 있었던 하루의 일들을 꼭 기록하는 편인데, 지친 남편은 얼른 씻고 끼니를 먼저 찾는 경우가 많아서 다툰 적이 몇 번 있었어요. 그러다 결국은 크게 싸우고 각자 걷자고 헤어진 날이 있었는데, 코스 종점에 가까워질 즘 머쓱한 표정으로 남편이 기다리고 있더군요. 저도 후회와 미안함 때문에 웃음이 나왔습니다. 올레길 어딘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남편을 어찌 미워하겠어요. 어쩌면 그런 남편 덕분에 함께 길을 걸을 수 있는지도 몰라요.”

Q. 여러 번의 제주올레 길 완주 중에서 가장 잊혀지지 않는 경험은요?

“2017년 우리 부부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기로 결심하고서 체력을 키워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배낭에 음식과 텐트 등 야생에서 지내며 전 코스를 걸을 작정으로 짐을 꾸려왔죠. 캠핑올레 완주를 시작한 겁니다. 7,8월 두 달에 걸쳐 캠핑과 걷기를 이어가는데 그렇게 낮에는 더운 날씨가 밤이 되면 또 얼마나 춥고 모기까지 극성이던지 요. 여름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날 걷기가 어려워서 정자 안에 텐트를 쳤어요. 그곳에서 끓여 먹었던 라면 맛은 정말 최고였습니다. 캠핑 올레로 완주를 마치고 산티아고 순례길로 떠나 860km를 무사히 다 걸을 수 있었습니다.”

 

Q. 걷기에 중독되는 이유가 있을까요?

“걷다 보면 사색이라고 하면 거창한데, 결국은 스스로 찾고자 하는 답들에 가까워지는 생각들을 할 수 있게 돼요. 작년과 올해, 발가락 수술을 두 차례 받으면서 체중이 급격하게 늘었는데 올레길을 완주하고 5kg 정도 감량했어요. 몸에 지방은 줄어들고 근육량은 늘었죠. 생각도 비슷한 것 같아요. 머릿속이 비워지면 마음이 가벼워 지는 것 같습니다.”

 

완주의 훈장인 뱃지와 패스포트

 

Q. 걷기 중독을 이끈 제주올레 길은 김재선씨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단순히 길을 완주하기 위해서 오신 분들은 완주하고 나서도 별다른 감흥이 없다고 하기도 하고 올레길을 한 번 완주하는 것만으로 만족하기도 해요. 하지만 저는 계속 걷고 싶어져요. 길을 걷는 경험을 통해 마음이 치유되고 점점 건강해지고 있거든요. 인생을 살다 보면 다양한 일들을 겪고 기쁜 일만큼이나 어떤 순간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아픔도 생기고요. 그런 분들에 게 올레길을 걸어보라고 권하고 싶고, 제가 길에서 얻은 감동을 클린올레나 봉사를 통해 되돌려 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Q. 올레길 도보 여행자들을 위한 부부의 꿈이 있다고 하던데요

“제주도 물가가 높은 편이라 제주올레 길 전코 스를 경험하는 게 경제적인 이유로 부담스러운 경우도 있을 것 같아요. 그래서 남편과 이야기 했습니다. 우리가 나중에 여유가 생기면 좋은 공간을 사서 건축일을 하는 남편이 리모델링을 하고, 커피업을 하는 제가 무료로 커피를 제공하는 공간을 만들자고요. 길을 걷다 쉬기도 하고 함께 의미도 나눌 수 있는 그런 공간을요.”